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M1918 브라우닝 (문단 편집) == 상세 == 브라우닝 자동소총은 [[분대지원화기]]의 선조격인 물건이다. 이 물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기관총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1차대전이 터지기 직전, 서구 열강들은 새로운 화기인 기관총의 등장에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관총은 너무 무거웠으므로[* 당장 맥심 기관총도 총 그 자체의 무게만 30kg에 육박했으며, 거기에 냉각수와 탄약까지 휴대해야 했다. 이 무게를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군대에서 [[M2 브라우닝 중기관총|MG50]]을 총열 달고 들어보자...] 1인 사격은 커녕 1인 도수 운반조차 사실상 불가능했고, 아군 참호를 넘어 적의 참호로 돌격하는 보병의 열을 따라 지원사격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15년 독일군이 제작한 [[MG08#MG08/15|MG08/15]]와 1918년에 제작한 [[MG08#MG08/18|lMG08/18]]은 그 무게를 줄여 기동성을 향상시키려 하였으나 이마저도 무식한 무게로 인하여 본격적인 경기관총으로 운영하기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이전 모델인 MG08/15는 냉각수까지 휴대해야 했다. 이에 미국과 프랑스와 같은 국가들은 "기관총을 줄이는게 안 되면 소총을 늘려보자!"라는 개념으로 신무기를 개발하게 되는데, 이 물건이 바로 자동소총이다.[* 영국은 충분히 들고 다니며 운용할 수 있는 [[루이스 경기관총]]을 사용하고 있어서 걱정이 덜한 편이었다. 실제로 적국인 독일을 포함한 각국의 병사들도 루이스건을 탐내서 노획 1순위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물건으로는 프랑스의 [[쇼샤]]와 이 항목의 BAR이 있다.[* 브렌 경기관총의 원조인 [[Vz.26]]은 훨씬 뒤의 물건이다. 일반적으로 쇼샤와 BAR까지를 자동소총으로 보고 Vz.26부터는 경기관총으로 분류한다. Vz.26 등은 애초에 기관총 용도로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동하는 보병을 지원하며 사격해야 했기 때문에 자동소총과 함께 '돌격사격'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다. 그 당시 돌격사격의 개념은 대충 이렇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c09a03754cdb20d2d195eabc1d3424b.jpg|width=100%]]}}} || || [[쇼샤]]의 서서쏴 자세를 취하는 [[루마니아군]] 병사.[br]1차대전 당시에는 M1918 브라우닝도 이런 방식으로 운용했다. || 따라서 BAR은 정밀한 조준사격이 기본적으로 요구되지 않았고,[* 하지만 반자동 사격 기능이 존재했고, 정밀 사격이 요구되는 볼트액션 소총인 [[M1917 엔필드]]의 가늠자를 사용했다.] 기동하며 사격해야 했기에 가벼울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무거운 탄띠는 사용할 수 없었으며, 기본적으로 서서 허리에 낀채로 제한적인 제압사격이 요구되었으므로 양각대 또한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용 탄종은 기본 소총과 같은 [[7.62 mm#s-1.3|30-06 스프링필드]]탄을 사용해야 했다. 따라서 M1918 브라우닝은 우리가 잘 아는 대구경 자동소총, 통칭 [[전투소총]]같은 형태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곧 1차대전의 참호전에서 돌격사격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미군은 이 개념을 폐지하게 된다. 돌격사격용으로의 용도가 사라지고 BAR은 몇 차례 개량을 거치게 된다. 1939년에는 생산성을 높인 개량형인 A1이 등장하였다. 돌격중 화력을 제공하려던 초기 버전과 다르게 A1은 거치 사격을 위하여 양각대를 달았으며, 최소한의 조준사격을 위해 단각대를 단 버전도 있었다. 반자동 사격 기능이 추가되었고, 생산성 향상을 위해 핸드가드의 체커링을 제거하고 보다 단순한 디자인이 적용되었다. 이 BAR은 1940년에 한번 더 개량을 거치게 된다. 이 모델이 M1918A2로 본격적으로 미군 제식 분대지원화기로써 채택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사용되었다. A2버전은 돌격 사격 용도와 거치 사격 용도를 모두 충족하기 위해 반자동 사격 기능을 제거하고 분당 300~450발의 저속 사격과 분당 500~650발의 고속 사격의 사속변경 장치를 탑재하였다. 기존 BAR에 달려있던 [[M1917 엔필드]]의 가늠자를 교체하고, 편의를 위하여 양각대가 총구 끝으로 옮겨졌으며, 분대지원화기에 충실하도록 중총열을 장착하여 더 무거워졌다. 그래도 당시에는 자동화기 중에 가장 가벼운 무기 중 하나였다. 1차 세계대전만 하더라도 동일한 돌격 사격 용도로 사용된 [[쇼샤]]가 9.1 kg이였으며, 최초의 경기관총인 [[마드센 경기관총]] 또한 9 kg대였으나, BAR만 유일하게 '''탄창 포함 7.25 kg'''의 무게를 가졌다. 2차대전 중 사용된 영국의 [[브렌 경기관총]]도 Mk I 과 Mk II는 10 kg이 넘어갔고, 브렌의 배다른 형제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96/99식 경기관총|99식 경기관총]]도 10 kg에 달하는 무게를 가졌다. 결정적으로 현대의 관점에서 사용되는 분대지원화기인 M249의 경우 빈총 무게가 7.5 kg, 200발 탄통 합산 10 kg 가까이 되므로 초기 BAR의 무게는 결코 무겁다고 하기 힘들다. 오히려 [[M60 기관총|현대의]] [[FN MAG|7.62 mm]] [[PKP 페체네그|다목적]] [[MG5|기관총]]들은 빈 총 무게를 10 kg 내외로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무게가 강조되는 것은 BAR이 '''사실상 자동소총'''이기 때문이다.[* 상술했듯 실제로 1차대전 당시에는 전투소총과 비슷하게 운용하기도 했다.] 현대의 돌격소총이나 전투소총은 무거워봐야 4kg 내외를 유지하기 때문에 당시에도, 현대에도 자동소총인 BAR은 무거워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중 M1918A2는 경기관총으로 개발된 무기이므로 아무데나 가서 BAR이 무거운 쇳덩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 실제 2차대전 당시 사용된 미군의 주력 총기들, 그중 [[M1 개런드]]의 경우 4~5kg 대, [[톰슨 기관단총|톰슨 M1A1]]이 5kg 정도였다. 1950년대에 개발된 M14도 5.2kg의 무게를 가졌다. 사실 이 정도로 가벼워질 경우 당시 기술로는 .30-06 스프링필드 탄약을 연사하면서 나오는 반동을 상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덕분에 위력이 살짝 떨어진 7.62 mm NATO를 사용하는 M14도 개발 과정 중 완전자동사격은 기능으로만 달아놓고 포기하다시피 했다.[* 반면 BAR은 그 묵직한 무게 덕분에 반동 흡수 면에서는 유리한 점이 있었다.] 덕분에 M1918A2는 탄창을 끼운 전체 무게만 8.8 kg에 육박하는 쇳덩이가 돼버렸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대한민국의 성인남성이라면 대다수가 취급해 보았을 M16이나 K2 소총에 탄약을 가득 채우고 그것을 두 정 드는 것보다도 약간 더 무거운 정도다. 추가로 일반적인 BAR 사수는 9 kg 가까이 되는 자동소총에 전용 요대에 한 주머니에 탄창 2개씩 6주머니, 총 탄창 12개를 휴대하게 되는데, 그래봐야 240발에 불과하므로 추가로 같은 주머니 3개가 박혀있는 탄입대를 더 매게 된다. 결과적으로 BAR 사수는 기본으로 20 kg 정도의 군장을 지게 된다. 거기에 더해 부사수들까지 BAR 탄창을 지고 다녔으니 분대 전체의 짐덩어리(...)였던 셈이다. [[미 해병대]]의 한 [[자동소총]] 사수는 "난 B.A.R.에 자동소총 예비 탄창, [[수류탄]], [[군장]], 거기에 [[M1911]]에다 권총 예비 탄창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무게가 40 kg 가까이 나갔다. 정말 무거웠다."하고 불평할 정도. 서양인, 그것도 빡센 체력단련을 하는 미 해병대원도 불평하는 판이니 [[6.25 전쟁]] 당시 영양 상태 등으로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은 한국인은 오죽했을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어디까지나 서양인과 비교해서라는 것이다.] 당시 AR[* Automatic Rifleman(자동소총수)라는 뜻으로, 국군은 미군의 영향으로 BAR 사수를 이렇게 불렀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로 참전한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 총을 매고서 차렷자세로 서 있으니 넘어졌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vu12E.jpg|width=100%]]}}} || || M1918 브라우닝을 사격하는 미 해병대원 || 2차대전에서도 주력 보병 장비중 하나로 쓰였는데, 저속 사격이 추가되어 반동이 적어진다 해도 1차대전 당시의 M1918 브라우닝보다 무게가 1.55 kg 더 나갔기 때문에 가뜩이나 무거운 군장 무게로 고생하는 보병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그래도 발군의 연사속도와 화력으로 6m 밖의 적군 2명을 연사를 퍼부어서 '''3초만에 모두 사살했다'''는 실전 사례도 있다. 다만 단점으로 총열을 바꿀 수 없다거나,[* 해외 개량형인 벨기에의 FN Mle 1930이나 스웨덴의 m/37은 총열 교체가 가능하다. 다만 이놈들은 본격적인 경기관총 개념이 등장하던 시기에 나온 물건이다.] 장탄수에 비해 사격 속도가 빨라서 탄창을 자주 갈아줘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BAR은 애초부터 경기관총을 대체할 물건이 아니었기에 큰 단점은 아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USA Rifle Squad 1942-01.webp|width=100%]]}}} ||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미군 분대의 구성 화기 [[https://www.battleorder.org/usa-riflecoy-1942|출처]] || 2차대전 당시 BAR로 무장한 미군 분대는 나치 독일군 분대와 단순 1대 1로 비교할 수 없었다.[* 일단 9명으로 이루어진 Gruppe는 [[MG34]]나 [[MG42]]를 운용하는 경기관총조에 사수와 부사수,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분대장 3명이 편제되었고 나머지 6명은 전부 볼트액션 소총을 들고 있었다.][* 물론 이론상 그렇게 편제되었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만성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의 상황상 대부분의 분대장들은 안타깝게도 기관단총을 들고 싸울 수 없었다. 반자동 소총은 엄두도 못냈거니와 일선 S급 부대에서나 저 편제대로 무기가 보급되는 것이 현실이었고, 대부분의 독일 분대장들은 노획한 적군 기관단총을 쓰거나 분대원들처럼 Kar98k를 들고 싸웠다. 결국 사실상 독일 분대의 화력은 MG42가 모두 담당했다고 주장해도 무방하다.] 개개인의 화력을 강화함으로써 기관총에 의존하는 독일군 분대보다 유연한 기동과 작전에 좀 더 중점을 두고 배치한 무기였다.[* BAR을 경기관총으로 대체하는 방안은 거부되었는데, 첫째는 사격과 기동을 동시에 하기 힘들며, 둘째는 경기관총에 부사수를 꼭 배치해야 하기 때문에 분대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문제로 거부되었다.] 그러나 미 육군의 구식 편제로 인해 유연한 기동과 작전이 어려웠고 이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 미 해병대다. 미 해병대는 정글의 교전경험으로 육군과 다르게 12명의 소총분대를 3개의 [[사격조]]로 구성하고 사격조당 1정씩 BAR을 배치했다. 그리고 전후에 미 육군이 미 해병대의 사격조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분대를 9명으로 축소하고 사격조를 둘로 나눈 뒤 한 쪽은 화력을 투사하고 한 쪽은 우회기동을 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이 편제는 상황에 따라 기동조가 화력을 지원하고 화력조가 기동하는 유연한 대처능력이 중점이었다. 이는 현재에도 사격조와 다목적기관총(GPMG)보다 더 유연하게 사용가능한 분대지원화기(SAW)의 도입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 총의 영향 덕분에 보병들이 죄다 자동소총을 들고 다니는 21세기에도 미군에서는 분대 내 [[M249]] 사수를 여전히 자동소총수(Automatic Rifleman)라고 부른다. 그리고 미군은 개런드와 BAR를 통합한 자동소총인 [[M14 소총]]을 제식 소총으로 채택해 전군에게 보급시켜 분대 자체의 화력을 증가시키길 기대했지만, 높은 반동과 BAR에서 보였던 짧은 지속화력, 긴 길이로 인한 휴대의 불편함, M14가 투입된 [[베트남 전쟁]]의 짧은 교전 거리 등으로 인해 채용된 지 고작 5년만에 [[M16 소총]]으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BAR.jpg]]}}} || 한국전쟁에도 사용되었다. 당시 미군은 한국군의 상한선을 6만 5천 명 가량으로 보고 이를 기반으로 물자 지원을 하였으나, 턱없이 부족한 군수품에 비해 10만 대군을 목표로 무리한 증강을 하다보니 온갖 총기들을 다 끌어모아야 했고, BAR은 자동소총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경기관총의 보급이 굉장히 열악하여 BAR을 경기관총 대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독립 직후 북한과의 꾸준한 마찰이 있었던 1948년에서부터 계속 관찰된 문제임에도 제대로 된 보강이 이뤄진 것은 한국 전쟁 이후의 이야기였다. 또한 그럼에도 BAR 진지가 꾸준히 만들어져서 사용되었던 것은 화력면에서 기존의 반자동 소총이나 볼트 액션 소총에 비해 우수했고, 중공군의 공세지속능력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우수한 화력을 통하여 자동화기들에 대한 추가적인 엄호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M1919의 불안정한 지속사격능력의 보조도 한몫하였다.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2332049953|#]] 또한 혹한 지역에서의 문제가 부각되었는데, 혹한지역 전투를 겪어본 적이 없는 미군이라 혹한지역에서의 사용이 고려되지 않아 한국전쟁 중 UN군이 겨울에 북한에서 중국군을 상대할 때 [[장진호 전투]]같은 혹한기 전투에서 [[M1919 브라우닝|다른 미군]] [[M1 카빈#M2|제식 무기]]들처럼 얼어붙어 자동사격을 하지 못하고 한 발씩 쏴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때 그곳에서 소대장님도 선임하사관, 향도 분대장님들 모두가 전사했거나 부상되었기에 그러니 남은 건 맨 이등병, 일등병이더군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가 이 고지를 따야만 상관의 죽음에 보답할 것이고, 고지에는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올라갈 테니 너희들도 따라오라 하니 모두 그러겠다 하길래 먼저 뛰어 올라갔습니다. >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 고지 너머를 보니 교통호 속에 [[막대형 수류탄|방망이 수류탄]]을 들고 12-13명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거기다 대고 '''에이알을 두 탄창 쏘아 모조리 죽였습니다'''. 뒤돌아보니 아무도 날 따라온 사람이 없길래 다시 뒤를 보고 빨리 오라 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그러는 동안 옆에 있는 고지에서 기관총알이 마구 날아오기에 '''좀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서 제자리에 돌아갔습니다.''' >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 있는 몇 사람이나마 나와 같이 가면 문제없이 고지를 딸 것 같아서 '''다시 똑같이 올라가자''' 하면서, 적이 나오면 내가 처치하겠다 하니 모두 또 알겠다고 하기에 또 고지에 뛰어 올라가니 후사면 교통호에 또 어디서 기어나오는지 '''7-8명이 있기에 한 탄창을 가지고 모조리 사살해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앞과 똑같이 되어 버렸죠. 제자리에 돌아왔는데 조금 있으니 중대장의 철수라는 명령이 와서 모두 철수했습니다." 1952년 12월 6.25 전쟁 당시 노리 고지 전투에서 1사단 소속 박관욱 일병이 이 총 한 자루를 들고 고지를 점령해 낸 적이 있다. 이 일로 '노리 고지의 불사신'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국군은 물론 미 제1 군단장(Paul W. Kendall 중장)은 이 광경을 보고 '내 군생활 30년 동안 저런 병사는 처음 본다. 저 병사는 초인이 분명하다.'라고 놀라기도 했고, 이 병사에게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받도록 조치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도 한국군 병사가 브라우닝 자동소총을 "에이알(AR, Automatic Rifle, 자동소총)"이라고 읽는 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데이터에 따르면 박관욱 일병은 이후 임진강 전선에서 이등중사계급으로 전사하였다. 전후에는 대략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M1919 브라우닝]]과 더불어 [[예비군/대한민국|향토예비군]]의 중화기로 지급되기도 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UHo6pf3Lwj0|대한뉴스 제 1045호-전투 예비군에게 전투무기 장비 지급]] 또한 [[베트남 공화국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 1968년 구정 공세 즈음까지도 지원화기로 사용하기도 했다. 구정 공세 이후에는 미국이 [[M60 기관총]]을 보급하면서 현역 사단들에서 밀려나지만 각 성장 휘하의 지방군과 의군에서는 1975년 사이공 함락 때까지 꾸준히 귀중한 자동화기로 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